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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관 투어: 특별 전시

스마트폰을 통해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큐레이터의 목소리로 다양한 작품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원하시는 순서와 속도로 원하시는 만큼 많은 작품들의 설명을 들으며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미술품에 대한 정보를 들으시려면 아래 상자에 위치 번호를 입력하신 후 이동을 선택하고 위치에 왔을 때 재생 버튼을 누르십시오. 오디어 투어를 하시는 중에 다른 관람객을 생각하시어 헤드폰을 이용해 주십시오.

  • Stop 880

    James McNeill Whistler, Symphony in White, No. 1: The White Girl, 1861-1863, 1872
    Symphony in White, No. 1: The White Girl

    이 그림에서 제임스 맥닐 휘슬러는 여러 가지 흰색 색상을 이용하여 재미있는 공간적, 공식적 관계를 만들어냈습니다. 색상 선정을 제한하고, 색조의 대비를 최소화하고, 각도를 예리하게 왜곡함으로써 형태를 편평하게 하고 형태의 추상적 패턴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렇게 극적인 구도의 접근법은 국제 무역 증가로 파리에서 널리 알려지고 있던 일본 판화의 영향을 반영합니다. 휘슬러는 연인인 조애나 히퍼넌을 모델로 똑 같은 모습을 그려내는 것보다 추상적인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데 더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순수하게 심미적인 방향과 “예술을 위한 예술” 창작에 대한 그의 급격한 지지는 모더니즘의 구호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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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흰옷을 입은 소녀(WHITE GIRL), 휘슬러(WHISTLER)

     

    [NARRATOR – FEMALE ACTOR]

    해외에서 태어난 미국인 제임스 맥닐 휘슬러(James McNeill Whistler)가 그린 흰색 교향곡 1번, 흰옷을 입은 소녀(White Girl)는 1863년 파리에서 처음 전시되었을 때 주목을 받았습니다.  휘슬러의 애인 조안나 헤퍼넌(Joanna Heffernan)의 초상화지만 그림에 대한 화가의 근본적인 접근법이 열광적 칭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그림은 외설적인 주제와 뛰어나지 않은 기교, 인물의 유별난 모습, 지적이지 않으며 미완성이라는 등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영국의 비평가 존 러스킨(John Ruskin)은 휘슬러의 스타일을 대중의 얼굴에 물감을 던지는 행위로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휘슬러는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승소했지만 변호사들에게 비용을 지불한 후 파산했습니다. 

     

    일반인들은 예술 작품이 주제가 있어야 하고, 도덕적 진실 또는 문학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휘슬러는 “예술은 헌신, 동정심, 사랑, 애국심 등과 완전히 다른 감정과 혼동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눈과 귀의 예술적 감각에 호소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NARRATOR – FEMALE ACTOR]

    큐레이터 니콜라이 시코브스키 주니어(Nicolai Cikovski, Jr.)

                                                  

    [NICOLAI CIKOVSKI, JR. – MALE ACTOR 2]

    휘슬러는 교향곡, 야상곡 등과 같은 음악 용어를 사용하여 자신이 그린 그림을 묘사했습니다.  또한 사물을 묘사할 때 음악이 시각적으로 할 수 있는 것, 이야기하는 것에 의존하지 않는 예술로서 그림을 그릴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술은 그림, 색상 특히 이 경우 흰색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 흰색 옷을 입은 인물이 있고 배경도 흰색이지만 그의 그림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흰색이고, 차가운 흰색과 푸르스름한 흰색, 따뜻한 흰색이나 노랑, 오렌지색에 가까운 흰색 등 얼마나 다양한 흰색을 사용했는지 안다면 놀랍기만 합니다. 

     

    이것은 스스로 정의한 한계인데 다양한 흰색 톤에 대해 우리가 다양한 방식으로 더 관심을 가지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또한 가운, 블라우스의 소매, 배경의 멋지게 늘어진 옷감 등의 다양한 질감을 훌륭하게 그려냈고, 휘슬러가 이 단순한 이미지에 다양한 붓터치를 사용한 것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NARRATOR – FEMALE ACTOR]

    액자의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나비 문양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문양에 대한 설명을 들으시려면 1880을 누르세요.

     

    1880. 흰옷을 입은 소녀(WHITE GIRL), 휘슬러(WHISTLER) [LAYER]

     

    [NARRATOR – FEMALE ACTOR]

    휘슬러는 자신의 그림이 어떻게 보여져야 할지 꼼꼼하게 생각하는 화가였습니다.  여기에서와 같이 액자를 디자인하고 그리기도 합니다.  19세기 말의 화가들처럼 휘슬러는 일본 미술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일본 스타일에서도 개인적 심볼로서 나비를 선택했고 여기 액자에 보조 서명으로 사용했습니다. 

  • Stop 874

    Winslow Homer, Breezing Up (A Fair Wind), 1873-1876
    Breezing Up (A Fair Wind)

    윈슬로우 호머는 1866-1867년 유럽으로 긴 여행을 다녀온 뒤, 야외 풍경을 그리는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구스타브 쿠르베, 에두아르 마네, 클로드 모네와 같은 현대 프랑스 화가들의 영향이 컸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뒤 호머는 스포츠와 레크리에이션의 생동감 넘치는 장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따뜻하고 남북전쟁 후에 더욱 소박하고 순수한 미국에 대한 향수가 만연한 사회에 잘 맞는 매력적인 이미지를 그렸습니다. 바람이 불어오니, 즉 순풍은 국가가 100년을 맞은 해에 완성되었는데 19세기 미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사랑 받는 예술적 이미지로 꼽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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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불어오니(BREEZING UP), 호머(HOMER)

     

    [NARRATOR – FEMALE ACTOR]

    큐레이터 니콜라이 시코브스키 주니어(Nicolai Cikovski, Jr.)

     

    [NICOLAI CIKOVSKI, JR. – MALE ACTOR 2]

    우리는 내셔널 갤러리에서 가장 진귀한 보물 중 하나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어오니(Breezing Up)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이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고 하며,  1876년에 전시되었습니다.  1876년은 미국인들이 그 이전은 물론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도 매우 잘 알고 있는 미국 건국 1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호머의 그림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건국 100주년 기념과 분명 관련이 있습니다. 소년들은 그림을 통해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움직이며 특히 뒤쪽의 소년은 현대 평론가가 언급했듯이 훌륭한 예지력을 가지고 앞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NARRATOR – FEMALE ACTOR]

    이 그림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예를 들어, 호머는 배가 그림 속에서 움직이듯이 배를 그림 중앙에 배치하지 않고 왼쪽 끝으로 배치했습니다.  관람객에게 가까이 배치하여 오른쪽에 멀리 작은 배가 보이는 것과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크기와 원근의 구도는 실제 일대일 대칭에서 균형감을 전달합니다.  이러한 기술은 일본 미술에서 널리 사용되는 기법입니다.  1870년대에 이 그림이 인쇄되었을 때에는 일본 미술이 유럽과 미국의 예술가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습니다.  호머의 작품에서도 그러한 영향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호머와 일본 미술에 대한 설명을 들으시려면 1874를 누르세요. 

     

    1874 – 바람이 불어오니(BREEZING UP), 호머(HOMER) [LAYER]

     

    [NARRATOR – FEMALE ACTOR]

    큐레이터 니콜라이 시코브스키 주니어(Nicolai Cikovski, Jr.)

     

    [NICOLAI CIKOVSKI, JR. – MALE ACTOR 2]

    호머는 보스턴에서 뉴잉글랜드의 후손으로 태어났습니다.  호머는 거의 독학으로 예술가가 되었지만 예술적 재능과 감각이 뛰어나며, 그가 일본에서 직접 경험하지 않고 다른 다수의 예술가듯이 그랬듯이 일본 판화에서 습득했을 이 그림의 일본적 요소는 유럽과 미국에서 널리 통용되었고 수집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성장 과정 때문에 호머를 전형적인 양키 화가라고 생각하지만 이 그림에서, 그리고 화가로서의 활동 기간에 훨씬 더 많은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 Stop 850

    Augustus Saint-Gaudens, The Shaw 54th Regiment Memorial, 1900
    The Shaw 54th Regiment Memorial

    쇼 기념비는 19세기 미국 최고의 조각가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미술관에 있는 작품은 보스턴에 위치한 원본 청동 기념비에서 주조하여 만든 것입니다. 이 기념비는 북군에 지원하였던 남북전쟁의 첫 흑인 병사 연대 중 하나인 매사추세츠 지원 보병 54연대의 용맹한 활약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 연대는 1863년 1월 1일 아브라함 링컨이 노예해방을 선언한 직후 모집되었습니다. 위대한 웅변가인 프레드릭 더글라스와 같은 지도자들에게 고무되어 여러 주에서 지원병들이 찾아왔습니다. 더글라스의 아들도 제54연대에 임대하였습니다. 연대장은 헌신된 백인 폐지론 자의 하바드 출신 아들인 25세의 로버트 굴드 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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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 기념비(SHAW MEMORIAL), 세인트 고든스(SAINT-GAUDENS)

     

    [VOICE (MALE) – MALE ACTOR 4]

    쇼 기념비(Shw Memorial)는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미국 조각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로버트 고울드 쇼(Robert Gould Shaw) 대령과 남북전챙에서 싸운 최초의 흑인 병사 연대인 메사추세츠 지원 보병 54연대의 병사들을 기념한 작품입니다.  1863년 이 연대의 600명이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톤 근처에 있는 포트 와그너(Fort Wagner)를 공격할 때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이 전투에서 쇼 대령을 포함하여 거의 절반이 전사했다고 합니다. 

     

    이들의 용기를 기념하기 위해 보스턴 시민들이 뉴욕의 조각가 어거스트 세인트 고든스(Augustus Saint-Gaudens)에게 청동 기념비를 제작하도록 의뢰했으며 1897년 보스턴 커먼(Boston Commons)에 헌납했습니다.  앞에 보이는 조각품은 조각가의 실물 크기의 석고반죽으로서,  뉴햄프셔주 코니쉬(Cornish)의 세인트 고든스 국립 역사 지구에서 장기 대여하고 있습니다.  이 조각품이 1997년 9월에 여기 설치되었을 때, 전 합동참모 본부의 의장이었던 콜린 파월(Colin Powell) 국무부 장관은 개관식에서 소감을 밝혔습니다. 

     

    미국 최고의 군사 관직에 오른 최초의 흑인이었던 파월 장관은 최초의 흑인계 병사들에게 이 기념비에 대해 설득력 있게 말했습니다.  그의 연설을 잠시 듣겠습니다.

     

    [GENERAL COLIN POWELL – MALE ACTOR 5]

    “어거스트 세인트 고든스씨의 이 저명한 조각품에 이 석고반죽과 청동보다 더 어울리는게 있을까요?  로버트 고울드 쇼 대령과 그의 흑인 병사들의 자랑스럽고 혈기 넘치며 숙명적인 이미지는 어깨에 소총을 메고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남쪽으로 진행하는 걸음마다 결단력이 느껴집니다.  1863년 5월 28일 보스턴의 주의회 의사당 앞에서 영광스런 승리를 눈 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기념비를 이해하고 제대로 투시하려면 1863년 이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1776년 미국이라는 나라를 세운 시절로 돌아가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이러한 진실은 자명하고, 양도 불가능한 권리,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부여 받았다고 독립 선언문에 명시된 것을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또한 정부는 이러한 시민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이러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시민들도 있었습니다.  피부색이 검은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권리가 부여되지 않았습니다. 

     

    몇 년 후 제정된 미국 헌법은 미국은 신의 축복을 받은 국가라는 동일한 논리를 공표했지만 신의 축복에는 흑인들을 위한 권리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노예 제도는 흑인을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적 목적에서 이러한 이분법을 정당화했습니다.  흑인은 그냥 도구였습니다.  주인의 이익을 위해 도구로 사용되었고, 도구는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었고, 문화도 필요 없었고, 과거나 역사도 필요 없었고, 가족도 필요 없었고, 더 나은 삶을 누릴 권리나 자부심도 필요 없었고, 목적 의식도 필요 없었습니다.  도구는 아이들에게 물려줄 필요도 없었고,  가족이 필요 없었습니다.  흑인들을 서로 흩어지게 하고,  아이들을 팔아버렸습니다.  일부 미국인들에 대한 이러한 인간성 말살과 비하는 진정한 공포이며 노예제도의 죄악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듯이 미국이 축복한 국가는 이러한 이분법을 오래 견딜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노예제도를 폐지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명확해졌고 그러한 노력은 1861년 남북전쟁의 형태로 찾아왔습니다.  당시 흑인들은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줄 모든 기회를 거절당했고, 백인처럼 피가 붉은색이라는 것 이외에 흑인이 백인과 동등하다는 것을 입증할 기회를 거부당했습니다.  독립전쟁에서 흑인들은 1812년 전쟁과 기타 전투에 참전하는 것을 허락 받았지만, 전쟁이 끝나고 위험이 사라지자마자 더 이상 참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노예제도를 폐지하기 위한 위대한 투쟁이 시작되었고 흑인도 그러한 투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링컨은 처음에는 이러한 움직임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급진적인 생각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1863년까지 손실은 인력이 필요한 수준에까지 이르렀으며 프레드릭 더글라스와 노예해방론자들이 링컨에게 이러한 주장을 강요하자 이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남군은 같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할 콥(Hal Cobb)이라는 남부군 장군은 제퍼슨 데이비스가 남군을 위해 흑인 병사를 보집할 계획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콥 장군은 제퍼슨 데이비스에게 편지를 써서 이를 만류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요.  장작 패기, 땅파기, 농사 등과 같이 어떤 목적으로든 흑인을 활용할 수 있지만 흑인을 병사로 만들어 전쟁터에서 백인과 함께 참전한다면 노예제도 잘못될 것이고 남부군은 견딜 수 없게 되므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프레드릭 더글라스도 동일한 문제를 보았습니다.  그는 이 기회와 링컨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 흑인에게 파란색 군복을 입히고, 미국군이라고 부른다면,  또한 청동 허리띠와 모자를 착용하게 하고, 소총, 권총을 주고 미국의 병사로 만들어 국가를 방어하고 연방을 보호하도록 전쟁터에 내보낸다면,   그 후에는 정당하게 시민으로서의 완전한 권리를 부정할 수 없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흑인이 백인과 평등하다는 미국 사회의 한 제도였습니다. 

     

    프레드릭 더글라스의 권유로 정부가 그러한 발표를 하고 매사추세츠의 흑인 영향이 높아지자 수 많은 자원자가 생겼고 머지 않아 54연대는 충원이 되었고 55연대를 새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1863년 5월 28일 54연대는 영광의 퍼레이드를 했으며 주의회 의사당 앞에서 앤드류 주지사를 지나 운명과 죽음을 위해 남쪽을 향했습니다.  7주 후 포트 와그너 전쟁에서 참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전쟁은 로버트 굴드 쇼가 흑인 병사들이 이끄는 참호에서 사망하면서 끝났습니다.  600명의 병사 중에서 281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흑인 병사들이 나라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20만 명의 흑인 병사가 참전했던 전쟁이 끝나기 전에 흑인들의 참전으로 연방을 유지할 수 있었고 평등에 한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제 13차, 14차, 15차 법개정을 한 후에도 흑인 참전으로 획득한 자유를 온전하게 누리지 못했으며,  100년, 120년, 130년이 더 걸렸습니다. 

     

    그리고 현재가 되었으며 사회 통합에 대한 존중으로 그러한 발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흑인이 미국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우리는 엄청난 발전을 목격했습니다.  저는 그 흑인 병사들의 직계 후손으로서 어려분 앞에 서 있습니다.  저는 즉 미합동군의 고위 군사직인 미합동참모총장이 될 수 있었지만, 54연대의 병사들의 직접적인 혈통이며, 남북전쟁 이전에 저의 조상들의 혈통이며, 절대 잊을 수 없는 혈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이 점이 오랫동안 동기부여와 강인감의 근원이었으며, 지금도 그러합니다. 미국의 수도에 있는 이 멋진 동상이 수많은 백인과 흑인을 포함한 미국인들에게 동기부여를 하고,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과거가 있음을 알려주고, 얼마나 많은 발전을 이루었는지 보여주며, 미국 헌법 제정자들이 의도한 대로 더 완벽한 연합국가, 가장 완벽한 연합국가가 될 때까지 당분간 더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기를 바랍니다.  이 작품은 영광의 장면이며,  희생의 상징입니다.  우리 역사의 일부이고, 미국의 수도에서 모든 연령대의 미국 국민들, 여기를 방문하는 전세계 사람들이 이 멋진 작품을 동기부여의 원천으로 생각하시기를 바라며, 오늘 아침 이 행사에 참여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 Stop 801

    Thomas Cole, The Voyage of Life: Youth, 1842
    The Voyage of Life: Youth

    토마스 콜의 유명한 네 편짜리 연작은 인생의 강을 따라 여행하는 원형적 영웅의 여정을 좇아갑니다. 여행자는 젊음의 포부에 대한 상징인 몽환적 성에 도달하려고 대담하게 분투를 벌입니다. 여행자가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언제나 사납게 요동치는 강물은 그를 자연의 노여움과 사악한 악마, 자기 회의의 위협 쪽으로 거칠게 떠밀어 보냅니다. 이 시리즈는 오직 기도만이 여행자를 어두운 운명에서 구원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콜의 용감무쌍한 여행자는 발달 단계에서 청소년기에 놓인 미국의 의인화된 모습으로도 이해됩니다. 화가는 명백한 운명을 찾아 과열된 도전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심각한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서부개척과 산업화는 인간과 자연 모두에게 비극적 결과를 줄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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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항해(THE VOYAGE OF LIFE), 콜(COLE)

    [MAN – MALE ACTOR 4]

    토마스 콜(Thomas Cole)은 허드슨 리버 스쿨(Hudson River School)의 설립자로 알려져 있으며, 풍경화를 그린 19세기 중반의 화가들은 미국 황야의 장관을 주로 그렸습니다.  콜의 평생 작품 중에서도 지금 보고 계시는 인생의 항해 시리즈가 가장 유명한 작품이며, 두 개의 버전으로 그려졌는데 이 작품이 두 번째 버전입니다. 

     

    콜은 단순히 나뭇잎을 그리는 화가가 되고 싶지는 않다고 했습니다.  그는 특히 문학, 신화, 성경 등의 고상한 주제를 묘사하기 위해 풍경을 사용하는 것을 더 수준 높고 진지한 형태의 예술이라고 믿었습니다.  일반인들은 이렇게 거창한 의욕에 불편을 느끼기도 하지만 콜은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보다 앞선 시리즈는 제국의 행로(Course of Empire)라고 합니다.  이 작품에서는 하나의 캔버스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심오한 풍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항해는 크리스찬 에브리맨의 어린 시절부터 청년, 성년, 노년까지의 화려하고 우화적인 여정을 추적하는 내용입니다. 

     

    세 번째 단계인 성년은 감동적인 자서전 때문에 특히 항상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성년은 콜이 이 시리즈를 그릴 때 직접 경험한 인생의 단계이기도 한데 어두운 구름 속에서 떠다니는 배 위에서 항해자는 자살, 알코올 중독, 살인과 같이 가장 끔찍한 유혹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의 유일한 희망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늘에 있습니다.  항해자가 알아보지 못하는 항해자의 수호천사는 위에서 조용히 항로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어린 나무는 찢겨졌으며 배는 고장이 났습니다.  콜이 바위투성이의 기복이 심한 풍경이라고 불렀던 역동의 급류 속으로 배가 빠져들아갑니다.  뱃머리에 장식된 장식물은 항해자 만큼 벌어지는 일에 대해 걱정하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다 되었고 마지막 모래알이 모래시계 아래로 떨어지자 선수상의 얼굴이 절박해보입니다.  선수상을 둘려싼 장식물들은 무시무시한 급류가 눈앞에 있다는 생각에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콜은 각 그림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흥미로운 디테일을 설명한 문구를 적어 그림 옆에 배치했습니다.  이 문구를 각 작품 옆의 벽에 진열했지만, 동시에 콜의 설명을 보고 듣고 싶다면 여정이 끝나고 보트가 조용한 물 위에 떠있는 마지막 그림 노년(Old Age)으로 건너뛰십시오.  콜의 설명문에서 발췌한 문구를 읽어주는 것을 들으려면...

    [NARRATOR – FEMALE ACTOR]

    1801을 누르세요.  이러한 그림에 대한 흥미로운 역사와 최초 액자에 대한 설명을 들으시려면 2108을 누르세요. 

  • Stop 820

    John Singleton Copley, Watson and the Shark, 1778
    Watson and the Shark

    1778년 왕립미술원에서 왓슨과 상어가 전시되었을 때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부분적으로는 이렇게 끔찍한 주제가 전혀 생소했기 때문입니다. 1749년 14세 브룩 왓슨은 하바나 항구에서 헤엄치다가 상어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에 대한 존 싱글톤 코플리의 회화 기록에는 선원 아홉 명이 소년을 도우러 달려갔음을 보여주는데, 피로 물든 물은 소년이 오른쪽 발목을 방금 잃었음을 나타냅니다. 불안에 가득 찬 구조자들의 표정과 행동은 허우적거리는 동행에 대한 염려와 함께 자신의 위험에 대해 점점 실감하게 됨을 모두 드러냅니다. 기적적으로, 왓슨은 구조되었고 성공적인 상인이자 정치가로 성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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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왓슨과 상어(WATSON AND THE SHARK), 코플리(COPLEY)

    [NARRATOR – FEMALE ACTOR]

    존 싱글턴 코플리(John Singleton Copley)가 그린 이 근사한 풍경은 내셔널 갤러리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그림 중 하나입니다. 

     

    큐레이터 니콜라이 시코브스키 주니어(Nicolai Cikovski, Jr.) 

    [NICOLAI CIKOVSKI, JR. – MALE ACTOR 2]

    왓슨과 상어(Watson and the Shark)는 매우 복잡한 그림이며 매우 감정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브룩 왓슨(Brook Watson)에게 발생했던 사고를 묘사한 그림인데 이 14세의 소년은 상어에게 먹힐까 봐 겁에 질려있는 모습을 하고 있고 그림을 보고 있는 사람도 소년이 된 것처럼 상어의 입을 응시하게 됩니다. 

     

    왓슨은 하바나 항구에 정착한 상선에 탄 선원이었습니다.  하바나 항구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는데 무시무시한 상어에게 공격을 당해 오른쪽 다리 절반이 잘려 나갔습니다.  동료들이 상어를 죽이고 왓슨을 구출하기 위해 달려왔을 때 왓슨은 허우적대고 있었습니다.  코플리는 이 장면을 묘사한 것이며,  왓슨이 나중에 이 그림을 의뢰했기 떄문에 이 장면을 그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끔찍했던 경험을 왜 그려달라고 의뢰했을까요? 

     

    브룩 왓슨이 그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상어에게 공격당했던 상상도 하기 싫은 트라우마를 겪는 이 젊은이는 이 사고를 극복하고 살아 남아 매우 성공적인 런던의 사업가가 되었으며 시장이 되었습니다.  역경을 극복하고 성공한 이야기는 이 그림이 주는 도덕적 교훈입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폭력적인 사건을 예술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그림으로 바꾸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뱃머리에서 갈고리 장대를 작살로 사용하여 상어를 찌르려는 남자는 천국에서 사탄을 몰아내는 대천사 미카엘(Archangel Michael)을 의미하므로 종교적 중요성도 부각시키고 있으며, 그림이 죽음으로부터 구출되는 내용이므로 구원에 대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NARRATOR – FEMALE ACTOR]

    명문에 따르면 왓슨은 이 그림을 런던의 왕립병원(Royal Hospital of Christ)에 기증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 그림은 비극적인 사건에서 살아 남아 명예와 부를 누린 고무적인 사례로서 병원에 걸려있습니다.  이 병원은 고아원이기도 했는데 사실 왓슨도 여기에서 자랐습니다. 

  • Stop 701

    John Constable, Wivenhoe Park, Essex, 1816
    Wivenhoe Park, Essex

    편안함과 조화로움의 즐거운 정서가 사진과 맞먹는 선명함으로 이 풍경화 전반에 느껴집니다. 찬란한 햇살과 시원한 그늘이 있는 넓은 공간, 삐뚤삐뚤 늘어선 울타리, 그리고 나무와 초원, 강물의 균형은 실제 공간을 화가가 창의적으로 합성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존 컨스터블의 정확한 붓놀림은 동물과 새, 사람에서 잘 나타나며, 이런 작은 세부 요소에 중요성을 부여합니다. 이 시골 지역 풍경에 대한 화가의 깊고 강렬한 애착은 그의 작품에 지속적인 요소이며, 그의 습작과 스케치북들은 자신의 시골 고향의 회화적 요소에 흠뻑 매료되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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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벤호 공원(WIVENHOE PARK), 콘스타블(CONSTABLE)

    [NARRATOR – FEMALE ACTOR]

    1816년 영국 화가 존 콘스타블(John Constable)은 가족의 오랜 친구인 레보우 장군(General Rebow)이 소유한 에섹스 지방의 위벤호의 방대한 풍경을 그렸습니다.  콘스타블은 자신이 자연화라고 불렀던 그림을 신뢰했습니다.  관람객이 실제 장소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어했습니다.  빛과 그림자의 향연을 그림에 담기 위해 그는 야외에 캔버스를 설치하고 두꺼운 불투명 유화 물감을 정확하고 미세하게 발랐습니다.  콘스타블은 작업을 하는 동안 이곳에 머무르면서 약혼녀에게 진행 상황을 편지로 알렸습니다.  “위벤호 공원에서 지내고 있는데, 레보우 부인이 나에게 너무 무뚝뚝하다고 말했어.” 전문 화가였던 그는 중간에 더 많은 작품을 추가해서라도 자신의 후원자를 기쁘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큐레이터 프랭클린 켈리(Franklin Kelly).

    [FRANKLIN KELLY – MALE ACTOR 2]

    그는 이 편지를 통해 그림을 시작한 후 레보우 가족이 원하는 모든 대상을 캔버스에 담기에는 캔버스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아내에게 설명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그는 각 면에 3인치를 추가했고 어쩔 수 없이 이음매를 최소화하려고 했습니다. 왼쪽 아래에 소를 한 마리 더 추가했는데 관람객과 굴곡이 있는 풍경의 시각적 거리를 더 두기 위한 것이었으며, 오른쪽에는 그림의 가장 아름다운 요소 중 하나이며 2명의 남자가 호수에 어망을 설치하고 있는 작은 보트를 추가했습니다. 

     

    이 그림은 자연 경관과 현실감 때문에 언제나 호평을 받고 있지만 이 장소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생각해본다면 놀랄 것입니다.  광각 사진처럼 보이지만 어떠한 왜곡 현상도 없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명확해야 합니다.  원근법이 전체적으로 맞지만, 화가가 구도를 조정했고, 나무의 위치를 바꾸었으며, 그림과 반사 풍경을 수정했기 때문에 단순히 서서 그리는 것만으로 재현할 수 없는 구도이며, 사실처럼 보이지만 실제의 모습은 아닙니다. 

  • Stop 702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Keelmen Heaving in Coals by Moonlight, 1835
    Keelmen Heaving in Coals by Moonlight

    구름 사이로 달빛이 쏟아져내려 하늘과 수면을 비춥니다. 넓은 수면 위에 반사되는 달빛을 그린 두꺼운 임파스토(두껍게 붙어있는 물감)가 하늘의 광채에 견줄 만 하며, 빛의 점진적 변화가 강력하고 현기증 나는 소용돌이를 만들어냅니다. 오른쪽으로는 평저선 선원들과 강을 따라 석탄을 옮기는 시커멓고 바닥이 납작한 평저선들이 횃불의 주황 하양 불꽃과 대비하여 실루엣으로 보입니다. 석탄은 더 큰 선박으로 운반됩니다. 왼편 선박 뒤쪽으로, 화가는 회색 물감과 가느다란 선 몇 개로 저 멀리 보이는 공장과 배들을 암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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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빛에 석탄을 옮기는 선원들(KEELMEN HEAVING IN THE COALS BY MOONLIGHT), 터너(TURNER)

    [FRANKLIN KELLY – MALE ACTOR 2] 

    미국 및 영국 회화 담당 큐레이터인 프랭클린 켈리(Franklin Kelly)라고 합니다. 내셔널 갤러리는 수 많은 명작 중에서도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의 작품이 많은데 특히 그의 모국인 영국 이외의 장소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들을 가장 많이 소장하는 곳으로 매우 유명합니다.  그의 명작 중에서도 지금 보고 계신 이 작품은 1835년에 그린 달빛에 석탄을 옮기는 선원들(Keelmen Heaving in the Coals by Moonlight)이라는 그림입니다.  

    [NARRATOR – FEMALE ACTOR]

    이 풍경은 영국 북부 지방의 뉴캐슬 주변의 타인강으로서 석탄의 중심지입니다.  오른쪽에는 운송을 위해 선원들이 큰 범선으로 석탄을 옮기고 있는 바닥이 편평한 바지선이 있습니다.  

    [DAVID BROWN – MALE ACTOR 3]

    터너는 이 장면에서 일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달빛 아래에서 행동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멀리 달 축을 따라 뻗어가는 빛의 터널이 멋지게 반짝이는데 이 빛은 선원들이 주변을 밝히기 위해 사용하는 조명의 진한 주황색과 노란색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최근에 내셔널 갤러리 보존실에서 세척하여 극적으로 바뀐 모습입니다.  변색된 물감층이 노랗게 변색되기 전에는 터너의 최초 안료의 흰색과 은색이 섞인 파란색 위에 바른 노란색이 결합되어 달빛이나 햇빛도 아니고 어떤 종류의 빛처럼 보이지도 않는 녹색 빛이 나는 아우라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제 보존 처리 작업이 끝나 터너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연출했던 섬세하게 빛나는 은빛 파란색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NARRATOR – FEMALE ACTOR]

    이 작업을 의뢰했던 영국의 직물 제조업자는 동료의 작품을 의뢰했습니다.  베니스(Venice), 도가나(Dogana), 산 조르지오 마조레(San Giorgio Maggiore)라고 하는 일광욕을 한 캔버스로서 이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터너의 그림 복원을 위한 특별한 도전에 대한 설명을 들으시려면 7021을 누르세요.  

    7021 - 달빛에 석탄을 옮기는 선원들(EELMEN HEAVING IN THE COALS BY MOONLIGHT), 터너(TURNER) [LAYER]

    [DAVID BROWN – MALE ACTOR 3]

    터너의 평소 작업 방식 때문에 그의 그림을 복원하는 사람이 터너가 배치한 것을 부주의하게 바꿀 위험이 매우 큽니다.  따라서 이 그림을 보존실로 가져가 처리를 할 때 주의해야 하며, 관리 위원이 저나 동료와 같은 사람들과 일할 때 무엇보다 그림이 오늘날의 상태가 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을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했습니다.  

    이 작품과 같은 그림에서는 물 위에 반사된 빛의 아래쪽 가장자리에서도 터너가 물감을 매우 두껍게 사용했지만, 멀리 있는 배와 먼 배경의 오른쪽에 있는 돛대, 돛과 같은 다른 부분은 거의 투명하고 바닷물 색상의 물감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터너는 이러한 효과를 얻기 위해 엄청나게 정교하게 변화를 주면서 표현했으며 가까이에서 보면 어떤 종류의 정해진 공식도 찾을 수 없습니다.

  • Stop 222

    Paul Cézanne, Boy in a Red Waistcoat, 1888-1890
    Boy in a Red Waistcoat

    미켈란젤로 디 로사라는 이탈리아 소년을 그린 그림으로, 폴 세잔이 1888년부터 1890년까지 이 소년을 그린 네 점의 작품 중 하나입니다. 모든 그림마다 이 젊은이는 똑 같은 새빨간 조끼를 입고 있는데, 이것이 자칫 단조로워 보였을 각 구성에 대담한 악센트를 주고 있습니다. 거친 화법과 부족한 음영으로 이 작품은 현대 미술의 형태를 지닌 한편, 수심어린 듯한 소년의 분위기와 우아한 포즈, 즉 골판을 살짝 틀어 체중을 한발에 싣고 한쪽 팔은 구부려 허리에 손을 대고 있는 자세는, 의식적으로 시대를 초월한 작품성으로 부여하여, 세잔이 흠모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들의 초상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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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BOY IN A RED WAISTCOAT), 세잔느(CEZANNE)

    [NARRATOR – FEMALE ACTOR]

    필립 코니스비(Philip Conisbee), 유럽 회화 담당 수석 큐레이터.

    [PHILIP CONISBEE – MALE ACTOR 2]

    세잔느는 1888년에서 1890년 사이에 파리를 방문했을 때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전문 미술 모델이었던 젊은 이탈리아인을 채용했습니다.  형태와 색상 면에서 뛰어난 이 작품에서 의자의 라인, 인물과 배경 직물의 신중한 배치 등은 다양한 각도에서 곡선을 그리며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조끼의 빨강색은 파란색, 녹색, 황토색의 붓자국과 대조되고 있으며 빛과 그림자가 다양한 농도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특징에 대해 미술사가 미라 샤피로(Myra Shapiro)는 “세잔느의 예술은 매력적이거나 아름다운 물체에 충실한 옛날 방식의 그림과 근대의 추상적이며 의미를 가지지 않는 움직이는 듯한 색상의 하모니 사이에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는 확실하게 젊은 남자가 존재하고 조끼에 선명한 붉은색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울한 분위기를 전달합니다.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을 세잔느의 기념비적 작품인 아버지 초상화의 다양한 색상의 붓자국이 특징인 그림도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25년이나 먼저 그렸으며 물감을 두껍게 칠하고 진지한 모델을 사용한 이 작품은 색상 면에서는 인정을 받지 않았지만 마네와 비슷한 명암의 대조를 이루며 그려졌습니다.  이 그림에서 세잔느의 아버지의 강인한 성격과, 젊은 예술가의 인생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했을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 Stop 195

    Paul Gauguin, Self-Portrait, 1889
    Self-Portrait

    이 자화상은 프랑스 브레튼 햄릿 르폴뒤에 있는 한 여관 식당에서 찬장 문짝에 그린 것으로 가장 중요하고 과격한 폴 고갱의 그림에 속합니다. 머리 위에는 광채가 있고, 오른손은 몸에서 분리되어 뱀을 손가락 사이에 낀 모습으로 노랑과 빨강 비정형의 공간에 떠있습니다. 캐리커처의 여러 요소들은 아이러니하고 과격하도록 상반된 굴곡을 더해줍니다. 고갱의 친구들은 이 작품을 못된 캐릭터 스케치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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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화상(SELF-PORTRAIT), 고갱(GAUGUIN)

     

    [NARRATOR – FEMALE ACTOR]

    1883년에 폴 고갱(Paul Gauguin)이 화가가 되기 위해 증권 중개인을 그만두었을 때 그는 35세였습니다.  그는 1880년대에 가장 급진적이고 중요한 화가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인상주의적 실험을 마친 후 고갱은 자연으로 관심을 돌리며 단순화된 형태 또는 허구적 형태와 누구도 시도한 적이 없는 표현 스타일을 통해 더 심오한 진실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이 자화상의 모든 요소는 인상주의 작품과 대조적으로 잠재적 의미로 가득합니다.  빨강과 노랑으로 표현한 눈에 띄는 배경을 바탕으로 고갱은 사과, 광륜, 덩굴 식물이나 나뭇잎의 단순화된 패턴 등을 사용하여 자신을 표현했으며,  손에는 뱀을 지니고 있습니다. 

     

    필립 코니스비(Philip Conisbee).

    [PHILIP CONISBEE – MALE ACTOR 2]

    상징주의는 상당히 명확합니다.  사과와 뱀은 에덴동산, 유혹, 죄악, 인류의 타락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광륜은 인류애를 상징합니다.  고갱은 자신이 성인이면서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넓은 부분을 단조로운 색상으로 묘사한 것은 일본식의 그림과 칠보의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칠보는 밝은 색상의 부분을 무거운 구리선으로 정의한 중세 클로시네 에나멜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림에 떠 있는 머리는 언어적으로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는 분위기와 감정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하는 상징주의가 자주 사용하는 모티브입니다. 

     

    형태도 원시적인 방법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고갱의 머리카락은 파라오의 가발처럼 머리에 밀착되었고 양식화된 식물은 고대 이집트 나뭇잎을 연상시킵니다.  고갱의 머리 양쪽에서 솟아오르는 노란색 부분은 천사의 날개를 비유한 것 같지만 그 의미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냥 단순하게 테이블이나 큰 접시 위에 고갱이 머리만 올려놓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 Stop 162

    Claude Monet, Rouen Cathedral, West Façade, 1894
    Rouen Cathedral, West Façade

    1892년 2월, 클로드 모네는 세 번의 작품 여행 중 첫번째로 루앙으로 떠납니다. 도시의 성당 맞은 편에 방을 구해 스튜디오로 사용하며, 그 성당을 주소재로 일련의 작품을 그립니다. 모네가 매료된 것은 성당 자체라기보다는 불변하는 고딕 양식의 건물 정면 모티브가 날씨와 하루 중 시간에 따라 미묘하고 다채롭게 변화하는 것을 잡아내는 문제였습니다. 거의 2년이 지나는 동안, 모네는 총 30점의 캔버스를 완성하였는데, 그 가운데 28점이 서문을 그리고 있습니다. 루앙대성당은 모네가 1890년대에 완성한 모든 일련의 작품 가운데 가장 야심찬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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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앙 대성당(ROUEN CATHEDRAL), 모네(MONET)

     

    [NARRATOR – FEMALE ACTOR]

    이 그림과 옆에 있는 그림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작품이며 연작 중 일부입니다.  모네는 1895년에 연작 중에서 20점을 전시했으며,  모두 북프랑스의 루앙 대성당(Rouen Cathedral)의 정면을 그린 작품입니다.  밝은 그림의 짙은 하늘색은 화창한 날씨의 늦은 아침에 그린 것으로 추측됩니다.  햇빛이 너무 강해서 성당의 정면을 바라보고 있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어두운 그림은 해가 질 때 그린 것입니다.  그림자가 건축물의 디테일을 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대성당은 종교적 암시를 위해 선택한 것이 아니라 빛의 효과와 분위기를 기록하기 위한 중립적인 불변의 도구로서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PHILIP CONISBEE – MALE ACTOR 2]

    인상주의파의 압도적인 문제점이었던 외부적 현실은 모네의 표현법으로 더욱 발전했기 때문에 이러한 그림에서 본 것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모네는 빛의 효과를 과장했고 특정 형태는 단순화했으며 색상을 사용하여 부위기를 만들었습니다.  모네는 대상을 보고 직접 그린 허구를 영구화하여 정확한 시각적 표현을 했지만 평생 이러한 그림들은 분명 작업실에서 완성되었습니다. 

    [NARRATOR – FEMALE ACTOR]

    하나의 시리즈는 명암이 서서히 바뀌고, 핑크에서 노랑, 그리고 짙은 녹색과 파랑으로 색상이 바뀌면서 분위기를 재현합니다.  이러한 그림을 바탕으로 모네의 역사적인 작품인 수련(Water Lilies) 연작이 탄생했는데 이 연작은 사람들이 번잡한 근대 도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를 만들어주기 위한 작품이었습니다.  모네의 연작 그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으시려면 1621을 누르세요. 

     

     

    1621 – 루앙 대성당(ROUEN CATHEDRAL), 모네(MONET) [LAYER]


    [NARRATOR – FEMALE ACTOR]

    함께 감상하기 위해 그려진 거의 동일한 대상에 대한 그림 연작이나 그림 그룹은 하루 중에서 특정 시간에 다양한 분위기에서 특정 주제를 탐구함으로써 미술 발전에 기여한 모네의 가장 중요한 업적입니다.  먼저 건초더미에서 시작하여, 포플러, 루앙 대성당 정면을 그렸는데 1893년 겨울부터 1894년까지 30번 이상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어떤 때는 여러 캔버스에서 동시에 작업하면서 빛이 바뀔 때 돌아다니며 그렸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작업실에서 연작을 함께 그렸으며 단체로 전시를 했습니다.  하지만 연작을 함께 판매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 Stop 210

    Edouard Manet, The Old Musician, 1862
    The Old Musician

    늙은 음악가에는 파리의 잡다한 도시 빈민이 등장합니다. 너덜너덜한 신사 모자를 쓴 넝마주이, 터번을 쓴 남자, 방랑 음악가와 어린 애 셋이 나오는데 한 아이는 아기를 안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불확실한 배경에 등장하는데, 이곳은 리틀 폴란드라고 알려진 파리 변두리에 있는 한 슬럼이라고 알려졌습니다. 오스망 남작이 주도하는 파리의 현대화 과정에서 내몰린 사람들을 에두아르 마네가 이토록 대단한 규모로 그려낸 것은 사회 논평의 요소를 도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인물들 사이의 상호작용 결핍과 설정의 모호성으로 이 작품은 전통적 서술 양식이 빠져 있으며 궁극적인 의미가 난해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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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늙은 음악가(THE OLD MUSICIAN), 마네(MANET)

    [NARRATOR – FEMALE ACTOR]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의 기념비적인 그림 늙은 음악가는 1862년에 그려졌으며, 예술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보수적인 심사원이 선정한 정부 인가 살롱에 소개되었습니다.  살롱의 그림은 주로 고결한 영감을 주는 주제를 다루지만 마네의 주제는 파리의 근대 거리 모습을 다루었습니다.  오늘날의 시청자들에게는 집시나 떠돌이 음악가, 비주류파가 노숙자와 비슷하게 생각됩니다.  필립 코니스비(Philip Conisbee), 유럽 회화 담당 수석 큐레이터.

     

    [PHILIP CONISBEE – MALE ACTOR 2]

    이 그림을 볼 때마다 그림, 그림의 표면, 붓자국, 터치 등에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합니다.  예를 들어, 왼쪽의 파란색 치마를 입은 소녀나 소녀가 안고 있는 아기를 보십시오.  또는 소녀 옆에 있는 소년은 소매가 넓고 지나치게 큰 셔츠를 입고 있습니다.  화가의 제작 과정이 명확하게 보이는 부분에서는 마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특유의 물감을 많이 쓰는 붓자국을 남기는 17세기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Valasquez)가 떠오릅니다.  벨라스케스가 연출하는 빛과 그림자의 놀라운 대비, 넓고 강렬한 물감의 사용 기법은 마네의 혁신적인 사실주의 스타일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NARRATOR – FEMALE ACTOR]

    이 새롭고 활기찬 묘사법을 사용한 마네는 전통적인 미술계의 표준과 관행을 깼습니다.  마네는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은은한 색상으로 작업을 했지만 그의 작품은 늘 마무리 작업이 부족하고, 붓터치가 너무 자유로우며 눈에 띄기 때문에 학계의 표준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오른쪽에 높은 모자를 쓰고 있는 남자는 기본적으로 얼굴에 특징이 없습니다.  마네에게는 시각적 현실감을 맹목적으로 흉내내는 것보다 회화 양식에 대한 실험이 더 중요했습습니다.  마네가 처음 작품을 전시했을 때 소설가 겸 비평가이며 마네의 훌륭한 옹호자였던 에밀 졸라(Emile Zola)는 마네의 작품에서 그림 소재는 중요하지 않고 화법만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즉, 마네는 어느 것도 꾸미지 않고, 주제가 고귀한 것도 아니며, 그냥 캔버스 표면에 아름답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입니다.  늙은 음악가는 마네가 사회에 대한 견해를 밝힐 목적으로 그린 작품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졸라가 마네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들으시려면 1011을 누르세요. 

     

    1011 – 늙은 음악가(THE OLD MUSICIAN), 마네(MANET) [LAYER]

     

    [ÉMILE ZOLA – MALE ACTOR 5]

    이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말해야겠어요.  옥상에 올라가 소리치고 싶어요.  마네씨는 미래의 주인공이 될 것임을 확신해요. 내가 돈이 많아서 당장 마네씨의 모든 그림을 산다면 좋은 투자가 될 거에요.  쿠르베처럼 강인하고 타협하지 않는 성격을 가진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마네씨의 작품이 있을 곳은 루브르 박물관이에요. 

  • Stop 662

    The Emperor Napoleon in His Study at the Tuileries

    이 위용적인 초상화에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군사 제복을 입고 자기 책상 앞에 서있습니다. 책상 위에는 나폴레옹 법전 한 부가 놓여있습니다. 나폴레옹의 뒤에는 깃펜과 종이가 책상 위에 어지럽게 놓여있고, 거의 꺼질듯한 양초와 벽시계가 오전 4시 13분을 가리키고 있어 나폴레옹이 새 법 조항을 쓰면서 그날 밤을 보냈음을 암시합니다. 나폴레옹의 군사적 기량과 행정능력, 국민의 복지에 대한 그의 헌신을 강조함으로써, 자크 루이 다비드는 황제 권력에 대한 강력한 이미지를 창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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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폴레옹(NAPOLEON), 다비드(DAVID)

     

    [MAN – MALE ACTOR 4]

    서재에 있는 나폴레옹의 모습은 언뜻 보기에 사실적인 초상화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이 작품은 프랑스 신고전학파의 설립자인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의 천재적인 정치 선전입니다.  열정적인 정치 화가 다비드는 18세기 프랑스의 혁명적 변화를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후원했던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성표를 던진 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에 충성했습니다. 

     

    나폴레옹은 1804년에 스스로 황제가 된 후 다비드를 궁정 화가로 임명했고 다비드는 이를 수락했습니다.  이 섬세한 실물 크기의 초상화는 매우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황제가 조끼에 손을 넣은 자세로 책상 앞에 서 있는데, 당시 남성용 바지에 주머니가 없을 경우의 일반적인 편안한 자세였습니다.  나폴레옹의 키는 150센티미터, 그러니까 5피트가 간신히 넘었지만 다비드는 책상의 높이를 낮추고, 키 큰 벽시계 또는 벽 장식물 등과 같은 수직적 요소를 통해 시선이 위를 향하게 하여 키가 커보이게 했습니다. 

     

    이 사진에는 상징적인 디테일이 가득합니다.  예를 들어 의자는 왕좌를 모델로 하였으며, 의자 덮개는 근면함과 초기 통치자를 상징하는 벌 문장으로 장식했습니다.  책상 아래에는 나폴레옹과 알렉산더 대왕, 시저, 기타 왕실을 이끈 인물들을 연결한 플루타르크(Plutarch)의 영웅전(Great Men) 사본이 놓여져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점령지의 규모가 고대 로마와 같거나 그 이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군 정예부대의 야회복을 입고 있으며 자신이 만들어 자신에게 수여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포함한 3개의 장엄한 금속 훈장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타킹에는 주름이 보이고 머리카락은 헝클어져있으며, 면도가 필요한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도 메시지의 일부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양초가 거의 다 탔으며 벽시계는 4시13분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지도자는 나폴레옹의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 중 하나이며 프랑스 민법의 기반인 나폴레옹 법전을 위해 밤 늦게까지 일했을 것입니다.  정치적 의도는 분명히 있었지만 다비드의 자연주의와 이상주의가 완벽한 조화를 이룬 덕분에 이 그림은 주요 명작으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다비드의 그림에 대한 나폴레옹의 반응을 알아보시려면 6621을 누르세요.

     

    6621 – 나폴레옹(NAPOLEON), 다비드(DAVID) [LAYER]

     

    [DAVID BROWN – MALE ACTOR 3]

    나폴레옹은 이 초상화를 그리기 15년 전에 다비드의 작업실을 딱 한 번 방문했지만 다비드는 인물에 대해 철저하게 알고 있었고 어떻게 하면 그를 기쁘게 해줄 수 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다비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날 이해하고 있군.  나는 밤에는 백성들의 복지를 위해 일하고, 낮에는 백성들의 영광을 위해 일하고 있다네." 나폴레옹은 다비드가 자신의 이미지를 너무 잘 살린다는 것을 알고 기념적인 초상화를 두 번째로 그리도록 요청했습니다.  이 작품은 현재 나폴레옹의 후손이 보관하고 있습니다. 

  • Stop 621

    Francisco Goya, The Marquesa de Pontejos, c. 1786
    The Marquesa de Pontejos

    장 자크 루소의 저술에 영향으로, 18세기 자연에 대한 감성적 호감이 이 그림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공원 같은 배경에서, 후작부인의 드레스에 장미 꽃송이들이 장식되어 있고, 부인은 우아함을 의식하며 카네이션을 들고 있습니다. 예술적으로 손질한 헤어스타일과 넓은 챙의 모자는 영국에서 건너온 것으로 보이는 최신 유행을 나타냅니다. 그림의 엷은 톤은 스페인 예술에서 최후기 로코코 양식을 반영하는 한편, 전체적으로 푸른 은회색의 색조는 또한 초기 스페인 거장인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흔적을 보여줍니다. 프란시스코 드 고야는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습작하고 모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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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폰테호스 후작부인(THE MARQUESA DE PONTEJOS), 고야(GOYA)

     

    [NARRATOR – FEMALE ACTOR]

    1786년에 그려진 이 초상화는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de Goya)의 초기 작품입니다.  필립 코니스비(Philip Conisbee), 수석 큐레이터.

    [PHILIP CONISBEE – MALE ACTOR 2]

    이 초상화의 놀라운 점은 실물 크기의 전장 그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델도 대단한 인물이었음을 즉시 알 수 있는데 바로 폰테호스 후작부인(Marquesa Pontejos)이었습니다.  그녀는 포르투갈 주재 스페인 대사와 결혼했는데 남편은 스페인 국왕의 초대 목사의 동생이기도 했습니다.  결혼으로 인해 최상류층에 입성한 후작부인은 오른쪽 아래의 차분하고 매력적인 발바리 애완견과 함께 그림에 등장했습니다.

    [NARRATOR – FEMALE ACTOR]

    발바리는 유럽 왕실에서 인기 있는 애완견이었습니다.  이 발바리는 벨이 달린 핑크 리본을 자랑스럽게 달고 있는데 코르셋을 입은 허리에 감긴 주인님의 분홍색 띠와 잘 어울립니다.  이 그림은 24세에 결혼한 후작부인의 결혼을 축하하고 있는 듯합니다.

    [PHILIP CONISBEE – MALE ACTOR 2]

    후작부인은 매력적인 젊은 여성으로 표현되었는데, 약간 경직되어 보이는 것은 18세기 스페인 상류층의 격식임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후작부인은 매우 아름다운 흰색 리본이 달린 회색 드레스를 입고 있습니다.  드레스는 360도로 장미 장식이 있는데 실제 장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장미는 오래 동안 사랑을 상징했으므로,  이 그림은 아무래도 결혼 초상화를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손에는 카네이션을 들고 있는데 열정과 정절을 상징하는 꽃입니다.  이러한 정교한 드레스는 18세기 프랑스 패션과 마리 앙뜨와네트를 연상시키며 이 후작부인과 같은 모델은 프랑스 패션과 사상에 크게 매료되었을 것입니다.

     

    [NARRATOR – FEMALE ACTOR]

    1700년부터 스페인은 프랑스 왕족의 친척인 부르봉 왕가가 지배했습니다.  사실 스페인의 부르봉 왕인 찰스 4세는 고야를 궁정 화가로 임명하여 상류층과 잘 어울리도록 하였습니다.

    [PHILIP CONISBEE – MALE ACTOR 2]

    얼굴을 보면 매우 정교하게 그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야는 관찰을 통해 얼굴을 정교하게 묘사했으며,  드레스는 붓터치를 넓게 바르는 식으로 자유롭게 사용하여 레이스와 장식물의 가벼움과 경쾌함을 실감 나게 표현했습니다.

     

    [NARRATOR – FEMALE ACTOR]

    뒷 배경도 파스텔 색상으로 자연스럽게 표현하여 서정적인 동화와 같은 분위기를 냈습니다. 

     

    [PHILIP CONISBEE – MALE ACTOR 2]

    이 작품은 고야의 초기 작품으로서,  고야를 생각할 때 더 친숙하게 연상되는 무겁고 로맨틱한 분위기는 아직 여기에서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NARRATOR – FEMALE ACTOR]

    고야가 칙칙한 색상과 어두운 배경을 사용하여 그린 후기 초상화는 내셔널 갤러리의 다른 장소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 Stop 542

    Hieronymus Bosch, Death and the Miser, c. 1485/1490
    Death and the Miser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그린 이 패널화는 구두쇠의 영원한 운명이 정해지기 직전, 구두쇠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여줍니다. 침대 커튼 아래에서 작은 괴물이 고개를 내밀고 구두쇠를 황금 주머니로 유혹하는 한편, 천사 하나가 오른편에서 무릎을 꿇고 창문에 달려있는 십자가상을 영접하라고 촉구합니다. 죽음은 화살을 쥐고 왼쪽으로 들어옵니다. 선과 악의 대조가 그림 전체에 들어 있습니다. 침대 캐노피 위에 있는 악마는 지옥불이 들어있는 랜턴을 들고 있으면서 한 줄기 신성한 빛을 뿜는 십자가와 균형을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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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두쇠의 죽음(DEATH AND THE MISER), 보쉬(BOSCH)

     

    [NARRATOR – FEMALE ACTOR]

    구두쇠의 죽음(Death and the Miser)이라고 하는 500년된 이 목판화는 미국의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가 그린 소수의 작품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아르스 모르엔디(Ars Moriendi) 또는 죽음의 예술이라는 전통에 따라 그린 이 드로잉은 지옥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로에 놓인 구두쇠의 극적인 최후의 순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큐레이터 존 핸드(John Hand).

    [JOHN HAND – MALE ACTOR 2]

    구두쇠는 침대에 누워 있고, 왼쪽 문을 통해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데 이 구두쇠는 고개를 들어 왼쪽 위 창문의 십자가를 응시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으며, 천사는 구원을 받고 죄를 포기하라고 애원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침대 커튼을 통해 갑자기 작은 악마가 나타나 구두쇠에게 돈이 들어 있을 것 같은 주머니를 건네고 있습니다.  이 구두쇠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구두쇠는 위아래 어느 쪽도 바라보지 않습니다.  죽음의 형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이 어떻게 전개될지 암시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침대 발치에 있는 녹색 옷을 입은 사람은 한쪽 손으로 체스트에 돈을 넣고 있고 다른 한쪽 손으로는 묵주를 쥐고 있으며, 이 체스트 아래에는 작은 쥐의 얼굴을 한 악마가 보입니다.  이 사람은 신을 섬기는 동시에 돈을 챙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앞쪽 풍경은 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우울한 모습으로 망토와 자켓에 기대어 있는 작은 악마가 보이며 갑옷도 보입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 제단화의 왼쪽 외관을 보고 있는 것이며, 오른쪽 외관은 앞쪽 풍경의 주제가 계속되고 있으므로 모두 갖추어지기 전에는 이 그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구두쇠가 천국에 갈 것 같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NARRATOR – FEMALE ACTOR]

    작은 날개의 악마는 시그너처처럼 보쉬의 작품에 종종 등장하고 있으며, 침대 위에서 아래를 열심히 내려다보며 지옥의 작은 기념품을 쥐고 있는 털 많은 악마를 놓치지 마십시오. 

  • Stop 250

    Rembrandt van Rijn, Self-Portrait, 1659
    Self-Portrait

    렘브란트 판 레인은 일생 동안 수많은 자화상을 물감과 연필로 그리고 판화로 새겼습니다. 변화하는 그의 용모를 서로 비교해 보면서 그의 상태를 짐작해볼 수 있게 합니다. 렘브란트는 오랫동안 성공적인 삶을 살았지만 재정적 파산을 겪은 후인 1659년 이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그의 거대한 집을 비롯한 자산은 그 전해에 빚을 갚기 위해 채권자에게 경매에 넘어갑니다. 이 후기 작품에서, 관람자의 눈을 꿰뚫어보는 깊숙한 눈빛은 내면의 강함과 위엄을 표현하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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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화상(SELF PORTRAIT), 렘브란트(REMBRANDT)


    [MAN – MALE ACTOR 4]

    이 자화상은 렘브란트가 사망하기 10년 전인 1569년에 그렸습니다.  당시 큰 인기와 세속적인 성공을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화가로서 실패하고 파산을 선고했으며, 모든 소유물을 팔아야 했습니다.  그의 나이는 겨우 53세였습니다.  이 그림에서 그는 화려함과 거리가 먼 자신의 실제 모습을 거울을 통해 보고 있습니다.  깊은 주름, 처진 턱 아랫살, 둥글납작한 코, 어둡고 움푹 들어간 눈을 하고 있지만 시선은 흔들림이 없고 위풍당당한 표정입니다.  칙칙한 색상의 복장 때문에 빛을 받고 있는 얼굴에 시선이 집중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화가가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싶어하는 자기 분석의 노력을 볼 수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은 그냥 스쳐가듯이 보는 것보다 시간을 들여 관찰해야 합니다.  특히 인물이 관람객을 응시하고 있는 이런 자화상이 그렇습니다.  렘브란트의 세상으로 들어가면 그의 시선에 매료되고, 실제 인물을 보고 있는 것처럼 사실적 이미지의 힘에 빠져들고 맙니다. 

     

    렘브란트는 관객이 그림 그리는 과정에 참여하도록 하면서 이러한 불가사의한 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눈을 자세히 바라보십시오.  부분적으로 물감을 너무 두껍게 칠해서 입체감마저 느껴집니다.  사실 물감이 너무 두꺼워서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마치 화가가 물감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조형물을 만든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임파스토라고 하는 거칠고 두껍게 물감이 발라진 부위의 바로 주변은 회청색으로 얇게 덮여져 있었는데 이것은 밑칠로서 렘브란트가 의도적으로 비추어보이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정교한 명암의 흐름도 없습니다.  단순히 물감 두께의 변화만 있을 뿐입니다.  머리속으로 그러한 변화를 그려보면 렘브란트가 물감을 사용한 다른 방식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머리카락의 빛나는 부분은 붓의 뭉툭한 끝을 사용하여 물감을 긁은 것입니다.  그림 속 인물이 액자를 뚫고 현실로 나올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렘브란트의 초상화에는 찌푸린 눈썹이 자주 등장하는데 학자의 지적인 이미지를 연출하는 효과를 줍니다.  이 부분이 관람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극적인 빛의 효과도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기법, 임파스토, 얇게 바른 부위, 시선, 조명 등이 어우러져 이 그림의 분위기를 만들고 있으며, 관람객은 화가의 불운했던 삶에서부터 개인적 불확실성, 희망 또는 슬픔을 투영한 것까지 읽을 수 있는데, 렘브란트는 무엇보다 이러한 표현을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NARRATOR – FEMALE ACTOR]

    이 그림의 복원에 대한 설명을 들으시려면 2501을 누르십시오. 

     

    2501 – 자화상(SELF PORTRAIT), 렘브란트(REMBRANDT) [LAYER]

     

    [MAN – MALE ACTOR 4]

    이 그림은 오래 동안 먼지와 변색된 바니시로 덮여 있어서 어두워보였습니다.  그 결과 그림 속 인물은 지금보다 훨씬 더 우울해보였는데 세척을 하여 얼굴의 핑크톤이 보일 정도가 되었습니다. 

     

    복원을 하기 전에는 렘브란트의 몸통 부분이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한쪽 어깨가 앞으로 나온 비스듬한 고전적 자세에 머리 위치는 약간 뒤로하여 중후함과 신뢰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사실 렘브란트가 20년 전에 보고 그린 라파엘의 드로잉에서 유래된 것이었으며,  심리적이고 감성적인 특성을 가진 작품에 확고한 육체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 Stop 380

    El Greco (Domenikos Theotokopoulos), Laocoön, c. 1610/1614
    Laocoön

    속임수가 있음을 의심하여, 트로이의 신화적 사제인 라오콘은 백성들에게 그리스인들이 성읍 외곽에 놓고 간 목마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경고하고, 상자가 비었음을 확인하기 위해 상자를 향해 창을 힘껏 던졌습니다. 이 일로 그는 아테나 여신에게 바쳐진 물건을 모독했다고 신들의 노여움을 삽니다. 엘 그레코는 성난 신들이 보낸 뱀들이 라오콘과 그의 아들을 극도로 괴롭히는 한편 둘째 아들은 아버지 옆에 죽어 있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오른쪽에 그리다 만 인물들이 누구인지는 모호합니다. 화가는 비틀린 선과 충격적인 색채, 비논리적으로 설정된 공간을 사용하여 누그러지지 않는 파멸의 의식을 투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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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오콘(LAOCOON), 엘 그레코(EL GRECO)


    [NARRATOR – FEMALE ACTOR]

    큐레이터 데이비드 브라운(David Brown).

    [DAVID BROWN – MALE ACTOR 3]

    화가 엘 그레코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아티스트이며 그의 작품 중에서 다수가 미국, 특히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에너지와 열정, 영적인 힘이 포함된 종교적인 주제를 담고 있기 때문에 현대인들의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이 라오콘 그림은 엘 그레코가 이교도적 주제를 다룬 극히 드문 작품 중 하나입니다.

    [NARRATOR – FEMALE ACTOR]

    그리스 신화에서 사제 라오콘은 그리스의 참략자들이 선물로 남긴 목마를 받지 말라고 트로이인들에게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이 선물을 주더라도 믿지 말라는 그의 유명한 말은 무시되고 말았고 절망감에 빠진 라오콘은 목마에게 창을 던졌습니다.  이 그림의 중앙 왼쪽 멀리에 동물이 보이는데 이 목마는 엘 그레코가 트로이를 상징하기 위해 사용한 17세기 스페인의 도시 톨레도 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말을 헌납 받았던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는 라오콘의 행동에 화가 났고, 신들은 그에게 벌을 주기 위해 뱀에게 사제와 그의 아들을 죽이라고 명했습니다. 

     

    트로이인들은 희끗희끗하게 보이는 뱀의 꼬리 부분을 보고 성벽 안으로 들어온 목마를 받으라는 신호로 생각합니다.  밤이 되자 그리스 군사들이 목마의 배부분을 통해 기어 나왔고 트로이를 장악하면서 트로이 전쟁이 끝났습니다.

     

    [DAVID BROWN – MALE ACTOR 3]

    이 고전적인 이야기는 바티칸에 있는 동상이 이야기해주고 있는데 엘 그레코는 분명 그 동상을 알고 있었을 것이지만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영웅적인 근육질의 동상이 아니었습니다.  엘 그레코는 이러한 이교도적 주제를 수락하고 인물들을 기독교의 순교자처럼 묘사했습니다.  성스러운 인물을 묘사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순교자들을 유령의 모습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인물들은 저물어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이교도적 주제를 가지고 있지만 엘 그레코의 깊고 열정적인 정신 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NARRATOR – FEMALE ACTOR]

    오른쪽에서  기이하고 무심해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시려면 3801을 누르십시오. 

     

    3801 – 라오콘(LAOCOON), 엘 그레코(EL GRECO) [LAYER]

     

    [NARRATOR – FEMALE ACTOR]

    학자들은 아직도 이 미완성 인물들의 의미에 대해 의견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일 수도 있고, 트로이의 파리스 왕과 아름다운 왕비 헬렌일 수도 있습니다.  트로이 전쟁은 사실 파리스가 헬렌을 납치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혹은 인물들은 끔찍한 처벌이 실행되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신들일 수도 있습니다.  남성은 라오콘이 신의 명령을 수행하는 동안 순결 서약을 깨서 분노한 그리스 태양의 신 아폴로를 상징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독실한 엘 그레코는 1600년대 카톨릭 교회의 엄격한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경고를 할 의도를 가지고 이 그림을 그렸을 수도 있습니다.  이 인물들은 다양하게 해석되고 그림은 포착하긴 어려운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확실한 것은 엘 그레코가 매우 의미심장한 방법으로 색상, 형태, 구도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 Stop 532

    Matthias Grünewald, The Small Crucifixion, c. 1511/1520
    The Small Crucifixion

    청록색 하늘을 배경으로 불분명한 광원에 비춰져 윤곽선이 드러난 이 그림에서 예수의 수척한 체구가 십자가 위에 축 늘어져 있습니다. 틀어진 발과 손, 가시관, 고통에 찬 표정, 너덜너덜해진 샅바는 예수가 겪은 끔찍한 신체적 정서적 고통을 표현합니다. 그림의 분위기는 사도 요한과 동정녀 마리아, 무릎 꿇고 있는 막달레나 마리아의 비통한 표정과 드러내는 몸짓으로 더욱 고조됩니다. 마티아스 그뤼네발트가 사용한 거슬리는 섬뜩한 색채는 분위기와 성서의 내용을 모두 전달합니다. 예를 들어 어두컴컴한 하늘은 십자가 처형 당시 누가가 묘사한 “온 땅을 덮은 어둠”과 상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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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CRUCIFIXION), 그뤼네발트(GRUNEWALD)

     

    [JOHN HAND – MALE ACTOR 2]

    북유럽 르네상스 회화를 담당하는 큐레이터 존 핸드(John Hand)라고 합니다.  지금 북미 지역에서 유일하게 전시된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ias Grunewald)의 그림을 보고 계십니다.  작은 십자가 처형(Small Crucifixion)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작품은 내셔널 갤러리 소장품 중에서도 가장 소름 끼치고 끔찍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묘사했는데 몸이 십자가 밑으로 늘어져 있습니다. 상처 투성이의 몸은 여기 저기 맞은 자국이 있고 피부색이 변색되어 있습니다. 왼쪽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흐느끼고 있고 오른쪽에는 사도 요한이 있으며, 십자가 아래에 보라색과 파란색의 옷을 입고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은 막달레나입니다. 

     

    이 그림의 감정적 효과는 그뤼네발트의 천재적 재능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는 16세기 최고의 컬러리스트 중 한명이며, 색조에 약간의 산성 성질이 있습니다. 요한의 자세와 팔목과 손이 이상한 각도로 꺾인 모습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통증을 느낄 정도입니다.

    [NARRATOR – FEMALE ACTOR]

    깊은 영적 믿음을 회화 형식으로 표현한 그뤼네발트는 14세기의 스웨덴의 비르지타(St. Bridgit of Sweden)에서 이러한 기괴한 이미지를 인용하여 사용했습니다.  이 작가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실제 목격한 것처럼 예수의 고통을 강조하여 표현했습니다.  그뤼네발트는 예수의 낡은 샅바와 평소보다 기괴하고 강렬해보이며 숨막힐 것 같은 검푸른색 하늘로 처참한 광경을 강조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JOHN HAND – MALE ACTOR 2]

    십자가 바로 오른쪽 위에서는 일식이 일어나고 있는데 사실 1502년에 일식이 있었으며 그뤼네발트와 다른 독일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 그림은 십자가 처형이 있었을 당시 하늘이 어두워진 것에 대해 성서적으로 해석한 것이기도 합니다. 

  • Stop 315

    Giovanni Bellini and Titian, The Feast of the Gods, 1514/1529
    The Feast of the Gods

    로마의 시인 오비드가 쓴 패스티의 한 장면을 그린 이 그림에서, 신들 가운데 주피터, 넵튠, 아폴로가 숲속에서 숲의 님프들과 사티로스들의 시중을 받으며 먹고 마시는 흥청대고 있습니다. 그림 오른쪽에는 생식력의 신인 프리아포스가 자고 있는 님프인 로티스의 드레스를 몰래 들춥니다. 우화에 따르면, 실레노스의 당나귀가 곧 울어대는 바람에 좌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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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들의 축제(THE FEAST OF THE GODS), 벨리니(BELLINI)와 티치아노(TITIAN)

    [DAVID BROWN – MALE ACTOR 3]

    신들의 축제(The Feast of the Gods)는 15세기 베네치아 화가 조반니 벨리니가 80대 중반 사망하기 2년 전에 완성한 작품입니다.  그림 맨 오른쪽의 나무 통에 붙은 입체감 있는 종이 조각에 조반니의 서명과 날짜, 1514년이 적혀 있는 것이 보입니다.  이 그림은 진탕 마시며 즐기는 파티가 주제인 것 같습니다. 

     

    성스러운 초상화 성모상(Madonna)에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였던 만큼 벨리니에게 이 그림은 획기적인 변화였습니다.  하지만 벨리니의 제자와 같은 다음 세대의 르네상스 시대의 젊은 화가들은 외설적이며 신화적인 주제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벨리니가 외설적인 주제를 수락하자 젊은 화가들이 앞다투어 참여하려고 했습니다.  벨리니는 사실 이러한 파티를 올림푸스의 신들이 마시고 먹고 졸기도 하는 야외 소풍처럼 묘사하려고 했습니다.  왼쪽에 헬멧과 지휘봉을 쥐고 느긋하게 기대어 있는 머큐리를 그렸고 그 바로 오른쪽에는 신들의 통치자 쥬피터를 그렸습니다.  흰죽지수리가 쥬피터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살짝 흥미로운 요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른쪽 아래의 탐욕스러운 프리아푸스는 자고 있는 요정 로터스의 가운을 몰래 들추려고 하지만, 왼쪽 끝에 있는 당나귀의 시끄러운 울음 소리에 실패하게 되고 그 결과 전체적으로 깨어나는 분위기가 됩니다.  프리아푸스는 곧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창피한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당나귀에게 화풀이를 할 것 같습니다.  나이가 많았던 벨리니는 에로틱한 분위기에 완전하게 공감하지 않았을 수 있지만 그림을 너무 아름답게 그렸기 때문에 에로틱한 주제는 크게 두각되지 않습니다.  사실 많은 관람객들이 이 그림 앞에 서서 핑크, 화이트, 블루, 옐로우 색상이 빚어내는 화려한 교향곡과 아름다운 풍경은 물론 신들 앞에 놓인 과일 바구니, 머리 위의 다양한 모양의 화관, 술통에서 투명한 유리병으로 옮겨지는 와인 등 매혹적인 정물의 디테일을 칭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작품의 실제적 의미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그림의 아름다움에 감동하면서 지나갑니다. 

     

    그런데 이 그림의 풍경은 수정된 것입니다.  벨리니의 원작에서는 나무들이 오른쪽에서 시작하여 캔버스 전체로 확장된 모습이었습니다.  몇 년 후, 천재적인 제자 타치아노가 나무들을 바위산으로 바꾼 것이 왼쪽에 희미하게 보이는데, 이것은 주변에 걸린 그림들과 조화를 이루게 할 목적이었고 그러한 그림에는 타치아노가 직접 그린 3점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명작은 벨리니가 인물을 그렸고, 타치아노가 풍경을 주로 그린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WOMAN – FEMALE ACTOR]

    이 그림의 청소 작업에 참여했던 데이비드 불의 그림에 대한 멋진 설명을 들으시려면 3151을 누르십시오. 

     

    3151 – 신들의 축제(THE FEAST OF THE GODS), 벨리니(BELLINI)와 타치아노(TITIAN) [LAYER]

     

    [DAVID BULL – MALE ACTOR 2]

    저는 1985년에 이 그림을 청소하면서 1954년에 이 그림에 대한 선구적인 책을 썼던 내셔널 갤러리의 존 워커(John Walker) 전 관장 이 연구한 내용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졌습니다.  여기에는 1514년에 벨리니가 그린 원작의 구도를 포착한 X레이 사진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원작에는 인물들 뒤로 나무가 연속적으로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이 그림은 19세기부터 세척된 적이 없었으며, 더 이상 투명하지 않는 진한 황갈색 니스로 덮여 있었습니다. 지저분한 니스를 제거하자 다양하고 멋진 베네치아 색상이 모습을 드러냈고, 디테일이 훨씬 명확하게 살아났습니다.

     

    풍경을 처음에 수정한 것은 궁정화가였던 도소 도시(Dosso Dossi)였다고 생각했습니다. 타치아노는 도소가 작업한 곳의 대부분을 수정했지만 오른쪽 위 나무에 앉은 꿩과 바로 위에 있는 밝은 녹색 나뭇잎과 새는 그대로 두었습니다. 도소가 작업한 곳의 일부를 그대로 남긴 이유는 모르지만, 이 그림을 의뢰한 페라라 공작이 꿩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서 궁정화가가 꿩을 지우는 것을 분명 허락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페라라 공작이 애지중지하는 꿩이 방해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타치아노가 도소의 의도를 해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워커는 또한 타치아노가 그림속 인물에 대해 17차례나 수정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타치아노가 인물에 대해 어떠한 수정도 하지 않은 것을 확인했는데 X레이 촬영, 유추적 반사법, 미세한 물감 샘플 채취법 등으로 확인했습니다. 현미경으로 보았더니 물감의 연속적인 층을 구별할 수 있었고, 부위에 따라 물감이 14층으로 칠해진 곳도 있고 3층인 곳도 있었습니다. 물감을 분석하고 정보를 비교한 결과 어느 화가가 어느 층까지 그렸는지 구별할 수 있었습니다. 니스 제거에 대한 조사는 4년 반이나 걸렸고 제가 25살이었을 때였습니다. 과정이야 어떠했던 이 그림이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작품이라는데 여러분도 동의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 Stop 313

    Leonardo da Vinci, Ginevra de' Benci [obverse], c. 1474/1478
    Ginevra de' Benci [obverse]

    지네브라 데벤치는 피렌치의 부유한 은행가의 딸이었습니다. 그녀의 초상화는 미국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일한 작품으로 그녀가 16세에 결혼할 무렵 의뢰된 작품일 것입니다. 이 작품은 유화라는 새로운 표현 수단을 시험적으로 사용한 다빈치의 가장 초기 작품 중 하나입니다. 여자들은 집안의 담장에 둘러싸여 내보였던 시절에 다빈치는 그녀를 개방된 배경에 설정해 놓았는데, 풍경은 열려있는 창문을 통해서만 언뜻 보입니다. 정면을 똑바로 보거나 옆모습이 아닌 ¾ 포즈는 이탈리아 초상화법 초기 작품에 속합니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노간주나무 잎들은 르네상스 여성의 가장 큰 미덕이었던 순결을 나타내며 노간주나무를 뜻하는 이탈리아어인 지네프로가 그녀의 이름에도 활용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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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네브라 데벤치(GENEVRA DE'BENCI), 레오나르도 

     

    [DAVID BROWN – MALE ACTOR 3]

    지네브라 데벤치는 정말 독보적인 작품입니다. 부분적으로는 매우 희귀한 그림이라 그럴 수도 있죠.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다재다능하여 여러 일로 바빴기 때문에 그림에 투자할 시간이 많지 않아 현존하는 회화 작품이 19점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제가 1974년에 내셔널 갤러리에 왔을 때 담당했던 첫 번째 회화였습니다.  단독으로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에 4명의 경비를 동원하여 다른 이탈리아 작품들과 함께 옮겼습니다.  이 작품은 희귀성 때문만이 아니라 레오나르도의 혁신에 대한 열정과 과학, 기술, 에술에 대한 종합적 관심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작품으로 생각되어 1976년에 그림이 갤러리에 도착했을 때부터 가장 유명한 이탈리아 작품이 되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단 22세였을 때 이 작품을 만들었지만 그가 가진 모든 관심사를 여기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권력이 막강했던 메디치 가문을 위해 일하던 피렌체 은행원의 16세 딸의 초상화입니다.  소녀보다 나이가 2배나 많은 홀아비와의 결혼식에 맞추어 그린 그림으로 추측되는데, 당시에는 일반적인 일이었다고 합니다. 

     

    이전의 여성 초상화는 주로 옆모습이었는데 레오나르도는 당시 인기 있었던 자세인 정면의 3/4만 보이는 비스듬한 자세를 지네브라에게 취하도록 함으로써 지네브라의 개성을 더 많이 보여주고 성격도 더 자세히 표현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초기의 초상화는 안료와 같은 결합 매체로서 계란을 사용하여 그려졌습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기름을 사용했기 때문에 물감이 더 액체에 가까웠고 융통성 있게 취급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레오나르도가 자세하게 관찰했던 자연을 묘사할 때는 안성마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지네브라 뒤에 있는 향나무 덤불을 주목해 주십시오.  레오나르도는 뾰족한 가지를 빽빽하거나 엉성하게 변화를 주며 표현했고 가지 사이로 하늘이 보이도록 묘사했습니다.  그 결과 소녀의 머리가 돋보이고, 미묘하게 그려진 얼굴에 시선이 가도록 했습니다.  선으로 묘사하지 않고 아이보리색에서 창백한 장미색으로 변하듯 묘사한 소녀의 입술과 우아하게 물결치는 곱슬머리는 대가만이 표현할 수 있는 기법입니다.  레오나르도에게 멀리 보이는 흐린 배경과 물에 비친 나무를 포함한 모든 디테일은 자연의 연속체였습니다.  이 작품은 장엄하지만 레오나르도의 재능을 절반만 보여주고 있습니다.

    [WOMAN – FEMALE ACTOR]

    이 그림의 뒷면에 대한 설명을 들으시려면 이 패널의 반대쪽으로 걸어가셔서 3131을 누르세요. 

     

    3131 - 지네브라 데벤치(GINEVRA DE'BENCI), 레오나르도 [LAYER]

     

    [DAVID BROWN – MALE ACTOR 3]

    이 그림의 뒷면의 오른쪽 상단에는 빨간색 왁스 봉인이 있는데 이것은 이 그림이 200년 이상 리히텐슈타인 공주의 소유물이었음을 증명해줍니다.  멜론 가족에게 멜론 브루스 펀드(Elsa Mellon Bruce Fund)와 함께 이 그림을 기증받은 것은 박물관의 20세기 가장 위대한 성과 중 하나였습니다.  지금은 아마도 가치가 훨씬 더 높아졌을 것입니다. 

     

    뒷면의 문양은 지네브라에 대해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화관의 왼쪽 부분은 월계수로 되어 있어서 아마츄어 시인으로서의 업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른쪽은 경건함과 덕을 상징하는 야자나무 잎이고 가운데는 향나무의 잔가지인데, 상록수인 향나무, 즉 주니퍼는 이탈리아어로 지네프로라고 하기 때문에 지네브라의 이름을 장난스럽게 비유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향나무는 또한 순결을 상징하므로 어린 신부에게 적합한 상징물이었습니다.  사실 지네브라는 온유함, 경건함, 예의바름, 지성적인 매력 때문에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나뭇가지에 감겨있는 것은 이 그림의 주제를 요약하고 있는 라틴어 문구가 새겨진 두루마리입니다.  그 문구를 해석하면 “아름다움은 덕을 빛나게 한다”로서, 고결한 것은 아름다우며, 아름다운 것은 고결하다는 르네상스의 개념을 반영하는 문구입니다.  현대인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이 문구는 분명 이 멋진 작품의 의미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WOMAN – FEMALE ACTOR]

    최근 연구에 의해 이 초상화는 미완성 작품이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데이비드 브라운의 자세한 설명을 들으시려면 3132를 누르세요. 

     

     

    3132 – 지네브라 데벤치(GINEVRA DE'BENCI), 레오나르도 [LAYER]

     

    [DAVID BROWN – MALE ACTOR 3]

    레오나르도의 이 멋진 초상화는 사실 일부에 불과합니다.  지금 정사각형으로 보이지만 원래는 르네상스 시대의 다른 초상화처럼 세로가 긴 직사각형이었습니다.  사실 이 화관의 밑부분이 짧게 잘려져 있다는 것은 이 그림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실제로 지네브라의 손을 그린 드로잉이 있었습니다.  이 드로잉은 여왕의 소장품 중 하나였으며, 최근에 컴퓨터 기술 덕분에 윈저성에 있는 손 그림과 워싱턴 D.C.의 초상화를 결합하여 레오나르도 그림의 원본을 디지털로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초상화 뒷면의 변형방지 작업도 완료했습니다. 

  • Stop 280

    Sir Peter Paul Rubens, Daniel in the Lions' Den, c. 1614/1616
    Daniel in the Lions' Den

    피터 파울 루벤스는 17세기의 가장 위대한 거장 중 한 명이며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사실주의와 연극조를 결합하여 강렬한 정서적 반응을 끌어냈습니다. 여기에서, 사자 몇 마리는 우리는 똑바로 응시하여 우리가 다니엘처럼 사자들과 공간을 공유하며 같은 위협을 받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사자들을 실감나는 사실주의로 실제 크기에 가깝게 그림으로써, 루벤스는 이런 직접성을 고조시켰습니다. 사자들의 사실적인 움직임과 기막히게 표현된 털은 루벤스가 브뤼셀의 왕립 동물원에서 직접 관찰하고 스케치한 결과입니다. 극적인 조명과 다니엘이 과장된 감정 표출로 기도하는 자세가 사실성에 추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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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자굴의 다니엘(DANIEL IN THE LION'S DEN), 루벤스(RUBENS)

    [DAVID BROWN – MALE ACTOR 3]

    사자굴 속의 다니엘을 묘사한 이 거대한 캔버스는 다작으로 유명한 플랑드르 미술가 피터 폴 루벤스(Peter Paul Rubens)의 작품이며, 그림의 스케일과 극적인 주제는 화가의 성향만이 아니라 카톨릭 수호성인의 감각도 반영하고 있습니다.  르우벤 시대인 당시에는 다수의 전쟁과 혼란을 겪었으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불굴의 용기를 가지고 용감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사상을 가진 스토아학파와 다니엘의 한결 같은 믿음은 실제적으로 공통점이 많았습니다. 

    [NARRATOR – FEMALE ACTOR]

    이교도 신을 숭배하는 것을 거부하여 무시무시한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의 모습이 보입니다. 하지만 다니엘의 믿음이 통하여 그 밤을 무사히 보냈고 멀쩡하게 밖으로 나오려는 모습이 보입니다. 동굴 입구를 가리고 있었던 바위가 치워졌고 아침 햇살이 안도하는 다니엘의 얼굴을 비춥니다.  그는 천국을 바라보고 있고 두 손은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발끝까지 몸의 모든 근육이 긴장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은 다양한 자세로 자거나 경계하고 있는 사자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의 옆에는 입을 크게 벌려 하품하는 사자가 있는데,  포효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근육질의 굽은 혀와 대조적으로 아침 햇살을 받은 날카로운 송곳니가 돋보입니다.  다니엘의 한쪽 발 아래에는 거대한 야수가 깊은 잠에 빠져 있지만 오른쪽의 암수 한 쌍은 잠에서 깨어 쉴새없이 원을 그리며 걸으면서 서로를 위협합니다.  이 사자들은 루벤스가 브뤼셀의 왕립 동물원에서 실물을 보며 분필로 스케치를 한 것을 바탕으로 탄생했습니다.

    [DAVID BROWN – MALE ACTOR 3]

    바위 위에 서있는 사자는 바로 내셔널 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오른쪽의 암사자는 루벤스가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 르네상스와 클래식 조각에 매료되어서 돌아온 후 작은 청동상을 모델로 본뜬 것입니다.

    [NARRATOR – FEMALE ACTOR]

    루벤스 동굴의 꼭대기 부분을 그려서 액자를 벗어난 곳까지 그림이 계속되는 느낌을 주면서 그림에 빠져들게 했습니다.  그러한 극적인 기법은 감정의 개입과 역동적인 움직임을 강조하는 바로크 스타일의 상징이었습니다.  관람객의 시선은 실제 크기에 가까운 사자를 따라가며 그림을 누비게 됩니다.  사자굴에 널린 희생자의 골격이 보이지만 꿎꿎하게 살아서 아침 햇살을 받고 있는 다니엘에게 시선이 다시 돌아갑니다.  루벤스와 그의 그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들으시려면 2801을 누르세요.  루벤스 작업실 방문에 대한 현대적인 해석은 2802를 누르세요.

     

    2801 – 사자굴의 다니엘(DANIEL IN THE LION'S DEN), 루벤스(RUBENS) [LAYER]

     

    [NARRATOR – FEMALE ACTOR]

    피터 폴 루벤스는 미술 천재였으며 영웅적인 인격의 소유자이고, 훌륭한 언어학자, 외교관, 고전 학자였습니다.  그는 17세기에 북유럽에서 가장 추앙받는 화가였습니다.  사실 그림 의뢰가 많아서 이 작품처럼 규모가 큰 그림의 주요 부분을 그릴 때 작업실의 조수들에게 부탁하는 일도 종종 있었습니다.  당시 예술가들은 조수를 사용했지만 이 그림을 구입하는데 관심을 보인 영국 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루벤스는 이 작품 전체를 혼자서 그렸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루벤스 작업실 방문에 대한 설명은 2802를 누르세요.

     

     

    2802 – 사자굴의 다니엘(DANIEL IN THE LION'S DEN), 루벤스(RUBENS) [LAYER]

     

    [NARRATOR – FEMALE ACTOR]

    1621년 루벤스의 작업실을 방문했던 덴마크 의사는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위대한 예술가가 작업하는 것을 봤어요.  루벤스는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티치아노에게 편지를 소리내어 읽게 하면서 편지 내용을 지시하기도 했어요.  우리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하게 있었는데 작업을 하던 루벤스는 우리와 대화를 하기도 하고, 편지 내용을 듣고 지시하기도 하고, 우리 질문에 대답하기도 하는 등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어요.”

    [NARRATOR – FEMALE ACTOR]

    루벤스와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을 들으시려면 2801을 누르세요. 

  • Stop 470

    Georges de La Tour, The Repentant Magdalen, c. 1635/1640
    The Repentant Magdalen

    17세기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막달레나 마리아는 회개한 죄인의 한 예였습니다. 그녀는 예수의 가장 헌신적인 추종자가 되었고, 예수는 그녀가 이전에 지은 죄를 사하여 주었습니다. 여기에서 마리아는 테이블에 옆모습이 보이도록 앉아 있습니다. 양초는 이 구성에서 광원인 한편, 이 빛은 성자의 얼굴과 탁자에 놓인 물건에 금빛으로 비춰주어 영적인 의미를 전하기도 합니다. 촛불은 마리아의 왼손 실루엣을 보여주는데, 손은 책 위에 놓인 해결에 얹어있고, 이것은 다시 거울에 비춰집니다. 해결과 거울은 허영심의 상징으로, 인상의 무상함을 암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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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회하는 막달레나(THE REPENTANT MAGDALENE), 드 라 투르(DE LA TOUR)

     

    [NARRATOR – FEMALE ACTOR]

    성경에는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의 가장 헌신적인 추종자가 되기 위해 속세를 포기한 죄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이 그림에서 17세기 화가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 De La Tour)는 그녀를 과거를 회개하는 여인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필립 코니스비(Philip Conisbee), 유럽 회화 담당 수석 큐레이터. 

    [PHILIP CONISBEE – MALE ACTOR 2]

    막달레나는 흰색 셔츠에 어두운색 스커트로 구성된 매우 간단한 복장을 하고 있습니다.  심플한 나무 탁자에 기대어 앉아 한 손은 몇 권의 책 위에 놓인 해골에 올려놓고 거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이 해골입니다.  해골 뒤에는 흔들리는 양초가 보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헛된 세상을 상징하며, 육체는 일시적이고, 해골 즉 거울은 환상을 만들어 내며, 흔들리는 촛불은 실제 촛불과 흔들리는 신앙을 상징하고 있지만, 촛불의 흔들림도 일시적인 것임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의 분위기는 정말 뛰어납니다.  그림의 50% 이상이 어두우며 막달레나의 수심에 잠긴 모습을 비추고 있는 해골 뒤의 희미한 촛불은 약간의 힌트만 줄 뿐입니다.  여인은 우울한 모습으로 테이블에 기대어 앉아 과거에 대한 생각을 하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빛, 즉 촛불을 보면서 진정한 길, 진정한 빛을 찾고 있습니다. 

    [NARRATOR – FEMALE ACTOR]

    빛을 극적으로 사용하는 화가 라 투르는 이 그림과 같은 촛불 장면으로 유명하며, 빛과 그림자의 극명한 대비는 감정적 효과를 더 높여줍니다. 

    [PHILIP CONISBEE – MALE ACTOR 2]

    이 그림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막달레나의 소매입니다.  반사된 얼굴보다도 더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라 투르는 이 그림의 주제가 무엇인지 궁금하게 하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시선은 먼저 촛불의 꼭대기 부분에 머무르고, 빛이 반사된 소매로 옮겨진 후, 막달레나를 거쳐서 거울 속에 반사된 해골로 옮겨집니다.  이것은 그림의 주제에 주목하게 하는 우회적인 기법입니다.  라 투르는 사색과 성스러움이 넘치는 매우 극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화가입니다. 

  • Stop 510

    Jan van Eyck, The Annunciation, c. 1434/1436
    The Annunciation

    트리프티카, 즉 세 폭짜리 그림의 왼쪽 폭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이 그림은 누가복음에 기술된 수태고지를 그리고 있습니다. 종교적 상징주의는 곳곳에 상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배경에서, 교회의 위쪽 어두운 부분에 있는 벽화와 하나의 스테인드 글래스 창문은 구약을 나타내는 한편, 건물 아래쪽은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투명한 세 개의 창문이 있어 신약을 상징합니다. 구약에서 신약에서 이전하는 개념은 상층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둥근 아치 창문을 사용하고 하층에는 초기 고딕 양식의 뾰족한 아치 창문으로 바꾼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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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모영보(THE ANNUNCIATION), 반 에이크(VAN EYCK)

     

    [DAVID BROWN – MALE ACTOR 3]

    네덜란드의 화가 반 에이크가 그렸으며 탄성이 절로 나오는 이 성모영보(Annunciation)라는 작품은 세 폭짜리 그림 또는 3단 제단화 중 하나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 그림은 천사 가브리엘이 성모 마리아에게 아기 예수를 잉태하게 될 것이며 성령이 비둘기의 모습으로 그녀에게 올 것임을 알린 중요한 사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신의 은총으로 충만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인간 예수가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합니다.  루카복음에 있는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라는 문구가 천사 가브리엘의 옆에 나타납니다.  성모 마리아는 신이 하늘에서 읽을 수 있도록 뒤쪽에 있는 금명판에 대답을 거꾸로 적어 답합니다. 

     

    보석으로 장식한 예복을 입고 화려하게 미소짓는 천사를 통해 반 에이크는 성모 마리아의 소박함과 순수함을 더 돋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효과는 백합의 꽃잎부터 천사의 날개, 권장의 크리스탈이나 맨 앞의 쿠션 의자에 사용된 다마스크 직물 등에 이르기까지 절대적인 현실감을 주는 유화의 대상물을 묘사하는 이 예술가의 놀라운 능력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예복에 사용된 금색 직물은 금박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극히 가는 검정색 라인과 노란색 물감으로 십자가를 작게 그려서 만든 것입니다.  또한 고급스러운 벨벳에 생긴 보풀도 느낄 수 있을 정도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하이테크 세상에서도 이 화가의 예술적 기교가 찬사를 받을 정도라면, 사진을 본 적이 없는 15세기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진정한 기적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 그림은 지적인 면에서도 인상적이며, 복잡성, 박식함, 생각의 깊이 등 사실상 모든 요소가 상징성이 뛰어난 작품입니다.  원형 건물 밖의 마이크로갤러리에서 이 작품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이곳의 대화식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전체 화면에 작은 디테일을 띄워서 확인하거나, 반 에이크의 관점을 도표로 만든 것을 확인하거나, 인물들이 그림에 없다면 어떻게 보일지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NARRATOR – FEMALE ACTOR]

    심하게 손상된 이 그림을 복원한 방법에 대한 데이비드 불 관리위원의 재미난 이야기를 들으시려면 5101을 누르세요.  이 그림을 목판에서 캔버스로 옮긴 방법에 대해 들으시려면 5102를 누르세요.  이 그림의 복잡한 상징주의적 요소에 대한 정보는 5103을 누르세요.

     

    5101 - 성모영보(THE ANNUNCIATION), 반 에이크(VAN EYCK)[LAYER]

     

    [DAVID BULL – MALE ACTOR 2]

    이 작품은 볼셰비키 혁명이 끝나고 몇 년 후 앤드류 멜론이 레닌그라드의 에르미따주(Hermitage)에서 가져온 21점의 그림 중 하나였으며,  1941년에 내셔널 갤러리가 개관하자 기증했습니다. 

     

    러시아인들은 극한의 기후 때문에 반 에이크의 작품과 같은 목판 작품에 심각한 손상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목판의 그림을 캔버스로 옮기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 과정은 극히 섬세했으며 성공적이지 않을 경우 작품을 훼손할 수 있었습니다.  전환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그림 뒷면의 캔버스를 다리미로 가열하면 캔버스의 질감이 원래의 부드럽고 광택이 나는 표면에 각인되었습니다.  이것도 이러한 작업의 비극이었지만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반 에이크는 회색과 파란색 유화 물감을 두 층으로 발라 성모 마리아 가운의 초기 형태와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그 다음, 진한 울트라마린 안료 글레이즈를 사용하여 형태와 그림자를 묘사했습니다.  진정한 비극은 전환 작업을 마쳤을 때 보호막이 씻겨져 나가고 울트라마린 글레이즈도 사라졌을 때 발생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더 밝은 색상의 회색과 파란색의 밑그림으로 남게 되어 창백해지고 공중에 떠있는 유령같이 보인 것과 대조적으로, 천사 가브리엘의 강렬한 모습은 너무나도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의 조합은 심하게 균형이 깨진 모습이었습니다.  균형감을 회복하기 위해 파란색 글레이즈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명작에 손을 대는 것에 대한 결정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비어 있는 작은 부위에 그림을 채우는 것도 그렇지만 그림의 주요 부분을 다시 그리는 일은 또 다른 어려운 문제입니다.  다행히도 적외선 반사촬영으로 반 에이크가 그렸던 부분과 옷 그림자의 밑그림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새로 창조해야 할 부분은 없었습니다.  이 방법이 없었다면 복원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관리위원과 외과의사의 유일한 차이점은 외과의사의 경우 실수를 감출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원하는 데 수 개월이 걸리며 까다롭지만 이렇게 보람을 느낍니다.

    [NARRATOR – FEMALE ACTOR]

    그림을 목판에서 캔버스로 옮긴 방법에 대해 들으시려면 5102를 누르세요.  상징주의에 대한 내용은 5103을 누르세요. 

     

    5102 - 성모영보(THE ANNUNCIATION), 반 에이크(VAN EYCK) [LAYER]

     

    [DAVID BULL – MALE ACTOR 2]

    캔버스로 옮긴 방법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그림의 표면에 여러 겹의 종이를 붙여 그림을 보호합니다.  그리고 앞면이 아래를 향하도록 테이블에 올려 놓고 끌과 대패를 사용하여 오크판을 조심스럽게 떼어내면 반 에이크가 그림을 시작하기 전에 바른 흰색 바탕이 나타납니다.  이 바탕은 약간의 습기를 사용하여 긁어냈습니다.  앞면이 테이블 쪽을 향하면서 물감의 층만이 남게 됩니다.  그 다음 물감 층의 뒷면에 하얀색 납 접착제를 붓으로 바릅니다.  캔버스를 그 위에 올리고 다리미로 열과 압력을 가하여 붙도록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캔버스를 나무로 만든 스트레처 위에 올려놓고 주름을 편 다음 보호막은 제거합니다.

     

    [WOMAN – FEMALE ACTOR]

    상징주의 그림에 대한 설명을 들으시려면 5103을 누르세요.  손상과 복원에 대한 설명은 5101을 누르세요.

     

    5103 - 성모영보(THE ANNUNCIATION), 반 에이크(VAN EYCK) [LAYER]

     

    [DAVID BROWN – MALE ACTOR 3]

    반 에이크의 성모영보(Annunciatio)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Ulysses)와 비슷합니다.  그림의 거의 모든 요소를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에서 화가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수 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일신이라는 개념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로 전환된 것이지요. 

     

    이것은 교회의 건축물에서 가장 명확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천장 가까이의 아치는 이전의 로마네스크 양식 또는 로마식 스타일의 곡선을 이루고, 아래쪽 아치는 새로운 고딕 양식으로 뾰족한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창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맨 위의 창문은 지구 위에 서 있는 신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성모 마리아의 머리 뒤에는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3개의 창문이 있습니다.  상징주의의 원칙은 바닥의 장식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황도 12궁을 나타내는 둥근 메달 장식으로 정사각형의 장면이 배치되어 신이 별의 움직임을 포함하여 우주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들 정사각형에는 구약성서의 사건들이 있으며 신약성서의 사건을 예시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예를 들어, 맨 아래에는 예수가 사탄을 물리치듯이 젊은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죽이는 장면이 있습니다.